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밀비우스 다리 전투 (문단 편집) == 다리 == ||[[파일:밀비우스 르브룅.png|width=800]]|| 샤를 르 브룅의 미완성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제라르 오드랑의 판화, 1666년 해당 전투가 벌어진 다리는 오늘날의 그 위치에도 존재한다. 이탈리아어 이름은 '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Ponte_Milvio|Ponte Milvio]]'. 위키 백과에 따르면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. * 기원전 206년 [[제2차 포에니 전쟁]] 중 처음으로 다리가 세워졌다. * 기원전 109년 부수고 새로 지었으며, [[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|카틸리나]]의 밀서가 여기서 입수되어 결국 진압의 실마리가 되었고 밀리우스 다리의 전투가 펼쳐졌다. * [[중세]] 말에는 붕괴 위기로 교황 [[마르티노 5세]]가 자력으로는 안 되어 외부 전문가에게 수리를 의뢰해서 성공했다. * 18~19세기에 모양이 확 바뀌었다가, 1849년 [[이탈리아 통일]] 전쟁 중 [[프랑스군]][* 로마 교황은 로마와 그 근처 이탈리아 중부 지방의 영주이기도 했는데, 통일된다면 그 땅을 다 뱉어내야 한다. (뱉어내고 이탈리아에 완전히 소속시키자 항의의 표시로 [[바티칸 포로]] 상태로 있다가, 무솔리니가 이런 난국을 해결하고 국민과 교회의 지지를 얻고자 [[라테라노 조약]]을 체결한 결과 지금 바티칸이 탄생했다.) 옛날 서로마 말기 ~ 롬바르드 때와 달리 교황청/교황직 자체의 존립이 위험할 가능성은 전혀 없고 이탈리아 통일 당시에도 없었지만, 그때의 동로마-프랑크-롬바르드 사이에서 신변의 안전을 꾀했던 시절은 트라우마로 남았기에 로마 시 말고도 주변의 완충지역을 확보하고자 했고, 그 결과가 교황령이었다. 그래서 치열하게 지키고자 했고(이런 거 다 빼도 있는 땅 뺏기고 싶겠는가, 교황도 사람인데) 그래서 프랑스의 [[나폴레옹 3세]]와 제휴해 [[프랑스군]]을 파견받아 안전보장을 받았다. 로마 시내 주둔군만으로 안 될 것 같자 프랑스군이 북쪽에서 증원을 오는 것이었다.]을 저지하려는 [[가리발디]]가 [[장판파|다리를 끊었지만]] 바로 다음해(1850년) 교황 [[비오 9세]]가 다시 수리했다. * 오늘날에는 커플용 관광상품(...)을 내세워 로마 교외의 관광명소 중 하나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